정유재란 7주갑과 정유재란역사연구회의 책무
올해 정유년은 정유재란 7주갑이다. 420년 전 풍신수길은 임진년의 1차 침략에 이어 2차 침략에 나섰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명을 치려 하니 길을 내라(정명가도)” 를 내세운 1차 침략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으로 인해 실패했다. 뒤늦게 참전한 명군과 왜군 간 4년이 넘는 할지 협상이 결국 결렬되자 이에 조선의 남쪽 4도를 침탈할 목적으로 정유재란이 시작 됐다.
정유재란은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이 궤멸된 칠천량해전,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대승을 거둔 명량해전과 장군이 흉탄에 숨을 거둔 순천왜교성, 노량해전까지의 1년 4개월여 기간이다.
임진왜란 7년사 중 개전 초 1년 3개월, 강화기 4년여를 짚어 볼 때 정유재란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정유재란의 재침목표가 조선 수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 전라도를 공략해 호남지방을 장악하는데 있었기 때문에 왜군의 만행에 수많은 백성들이 잔혹하게 희생을 당해야만 했었고, 왜군들이 살아있는 사람의 코를 베고 전공으로 상을 받는 등 용서받지 못할 잔악무도한 만행이 이때 저질러졌다.
정유재란 막바지에 왜군은 장기 주둔 농성을 목적으로 남해안 각지에 성을 세웠다. 순천에도 소서행장이 왜교성을 쌓아 요새화했다. 조명 연합 수.륙군은 1598년 9월 20일을 기해 육지와 바다에서 왜성을 일제히 공격하는 사로병진 작전을 펼쳤다. 동북아 수.륙군 삼국이 맞붙은 유일한 국제 전투이다. 7년 전쟁을 마감하는 사실상 최후의 전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전몰한 노량해전만 강조되는 바람에 순천왜교성 광양만 해상에서 입체적인 작전을 펼친 조명 연합군의 활약상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일,중 삼국 병사들의 수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음에도 임진왜란 7년 전쟁사의 큰 흐름속에 왜곡된 역사로 인해 명량대첩의 신화와 노량해전만이 정유재란을 대변하고 있을 뿐 전란에 휩 쌓여 희생된 수많은 이 지역 백성과 무명 수군 장졸들, 그리고 한.일.중 동아시아 3국 병사들의 넋은 어디로 갔는지 그 흔적마저도 없어졌다. 허나 왜교성전투와 광양만해전의 역사를 뒷받침하는 전적지 유적들은 현존하고 있다.
이에 잊혀 져 가고 있는 정유재란 역사의 재조명을 통해 지방의 역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공감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자 한다.
첫째, 임진왜란 7년 전쟁사에서 어떠한 연유로 정유재란의 역사가 매몰되어 있는지? 지방사적인 측면에서 사료를 수집, 발굴하고 연구하여 지방사 인식의 변화를 시도함으로서 다음 세대들에게 임진, 정유재란의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통해 정유재란 정신문화를 선양하고자 한다.
둘째, 정유재란 말기 국난극복의 역할을 했던 전남동부지방 연해민을 비롯한 전라도 백성들, 참전수군들의 희생으로 지켜냈던 구국정신 등 우리지역 선인들의 희생적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한.일.중 동아시아 삼국의 참전 기념비적 성격을 담은 추모공원 조성을 추진하여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한다.
셋째, 광양만 신성포 앞바다는 정유재란 말기 광양만 해전의 주 무대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승지 유적이며 역사문화 유산이다. 그럼에도 경제개발 논리에 밀려 해상 전초기지였던 장도를 토취장으로 정해 바다를 매립하였을 뿐더러 유적지는 훼손, 방치되어 지역민들의 입장에서 보존, 복원 방안을 연구하여 역사문화 자원으로서 지역발전 동력으로 작용 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호남전역에서 자행되었던 선조들의 희생과 수난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임진,정유왜란이 남긴 교훈과 의미를 체계있게 정리하고 연구하여 정유재란 역사를 바로 알자 라는 역사의 대중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인식시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러한 불행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역사의 교훈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후손들이 기억하게 함으로써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단법인 정유재란역사연구회를 통해 동북아의 평화를 상징하는 중심지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